서쪽 하늘이 타오르듯 붉게 물들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석양일 텐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렌스터 왕비 알피오나는 불안한 마음속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에 남아있는 병사들은,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어린 병사들과, 현역이라고는 할 수 없는 노병이 대다수다. 국왕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 믿고 싶은 마음과, 이번엔 설마... 하는 불안이 번갈아 엄습하며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바람이 뺨을 스친다. 성의 발코니에는 서 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왕비 전하,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들어오십시오."
방 안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프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방에 들어가며 그 시녀에게 물었다.
"핀 님과 같이, 방에서 놀고 계십니다."
"그래요, 그럼 됐어요. 폐하의 연락은 아직 없나요?"
"아까, 드리아스 백작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만.."
"그런가요.... 고마워요, 이제 됐어요."
왕비 알피오나는 창가에 앉아, 다시 한 번 석양을 바라보았다.
칼프 왕과 결혼한 이후로, 지금까지 이렇게 불안했던 적은 없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들 큐안이 전사했을 때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었다. 그 어느 것과도 다른, 자신을 묘하게 침착하게 만드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이 없는 것이 이렇게도 불안하다니...의지할 수 있는 아들도 며느리도 없는 것이 이렇게 허전할 줄은 몰랐는데.."
떨어지는 해가 지평선에 다가와 있었다. 렌스터 왕국의 낙조를 연상하며, 서글픈 마음이 복받쳐 올랐다.
똑똑.
"왕비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알겠어요, 곧 가도록 하죠."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왕비는, 시녀의 목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큐안이 남긴 왕자마저 지키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설마 자신이 방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저 대를 이을 왕자만은 지켜 보이겠다. 그러한 생각을 북돋우며, 왕비는 일어섰다.
"불안한 마음은 이 성에 남아 있는 모두가 가지고 있어..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폐하에게 웃음을 사고 말겠지.."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은 왕비는 뒤돌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빛의 여운이 이어 오는 밤에 잠겨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만 같았다.
트라키아 강에서 대패한 렌스터군이었지만, 모든 병사가 사망한 것은 아니었고, 소수의 기사, 병사들이 간신히 살아남아 렌스터 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받은 친구에게 어깨를 빌려주기도 하고, 또 몇몇은 부러진 창을 지팡이 삼아 걷고 있었다.
"폐하의 말은 어디까지 가 버린 걸까.."
칼프 왕의 말이 전장을 달려 나간 것은 모두가 보았다. 그 등 위에는 왕의 모습은 없었고, 뒤이어 레이드릭의 함성이 들려왔었다.
악몽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면 용맹과감해서 "전신" 이라는 말을 듣던 칼프 왕이, 코노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별 대단한 힘도 없던 비겁한 레이드릭에게 목숨을 빼앗기다니...악몽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나는 여기에 두고 가. 빨리 이 소식을 성으로... 장군께 전해 줘."
"젠장, 여기까지 와서..."
상처 입은 기사 한 명이, 어깨를 빌려주고 있는 친구로부터 떨어지려 했다.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잖아...론다, 였던가. 그녀도 빨리 만나고 싶잖아. 그러니까..."
"그건 너도..."
"난 그럴 여자는 없어. 이 앞에 마을이 보이네. 저곳에라도 숨어들어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갈게."
"저기... 말이 있습니다. 기사님이 쓰러지셔서, 제가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만, 이 말을 쓸 수 있다면 써 주세요."
기사들의 말이 들렸는지, 말을 데리고 있던 병사가 그 말을 끌고 왔다.
"부상자를 태우고 있습니다만..."
"제가 메고 가겠습니다. 저, 마을에서는 힘이 센 걸로 통했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자, 빨리 가.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다간, 돌아갈 곳조차 없어져 버릴지도 몰라."
망설이던 기사는, 친구에게 지팡이를 건네주고, 말에 탔다.
"좋은 말이다. 이건 란츠 장군의 말이 아닌가."
"장군님의 말이라니.. 성함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에게 명령을 내리시던 분의 말입니다."
말을 끌고 있던 병사는, 말에 태웠던 병사를 등에 메며 조금 서글프게 대답했다. 전쟁터에서는 귀신과도 같은 전투를 벌이는 란츠 장군도, 병사들의 인망을 얻고 있었고, 모인 병사들도 잘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도 그 병사들일 것이다. 란츠 장군을 애도하는 마음이 잘 전해져 왔다.
"그럼,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란츠 장군. 당신의 이름은..."
"...티오입니다. 렌스터 근처 마을에 살았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기사 님."
"감사합니다. 그럼 갔다올게. 로물...."
"빨리 가, 기사로서의 역할을 다해... 카렐... 내 걱정은 괜찮아. 이래봬도 렌스터의 기사잖아. 돌아가신 폐하께 웃음을 살 생각은 없어."
"그럼, 렌스터 성에 계신 왕비님께..."
기사들은 말을 몰아,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먼스터 성을 함락시키는데 전념하기 시작한 트라키아군도, 국내의 동요를 막기 위해 필사적 이였던 레이드릭을 비롯한 코노트군도, 이 렌스터군의 몇 안 되는 잔당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국왕의 말은 트라키아 강의 참패 이후 3일 만에 국경의 고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말, 한 필 뿐인가... 왜 이런 곳에.."
"붙잡아라,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돌봐드렸던... 저건, 폐하의 말입니다."
"진짜인가?"
요새 위에서 그 말을 바라보던 병사 중 하나가, 요새의 문을 열고 달려갔다. 그 병사가 말을 부르자, 말도 순순히 따라왔다.
"폐하의 말이다... 이 안장의 장식도..."
"...핏자국인가, 이 검게 달라붙은 것은... 누구의... 설마...?!"
"말도 지쳐 있군. 쉬게 해 주자. 누군가가 이 일을 성에 보고해야..."
요새를 수비하는 대장이 두 명의 병사를 뽑아, 전령으로 렌스터 성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요새의 경비를 더욱 삼엄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틀 뒤, 다른 요새에 기사가 탄 말이 달려왔다.
"대장, 우리 군의 기사인 듯 한 자가 보입니다."
"전령인가?"
"아니오...저건...상처 입은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들어오라 해라. 언제든 전령을 성에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 둬라. 내가 이야길 듣겠다."
대장은 문 안으로 넘어지듯 들어온 말을 마구간에 맡기고, 타고 온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트라키아...강에서..트라키아의...기습을 받아..교전...코노트에게 배신...당해..폐하께선.. 혼란 속에서....전사하셨습니다..."
기사가 숨을 헐떡이며 말한 사실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폐하께서.."
"코노트의 배신이라니..."
"진 건가..."
"모두 조용히 하도록. 그런 모습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만, 그건 진실인 건가?"
대장은 그 젊은 기사에게 다그쳤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령. 이 사실을 렌스터 성에 보고해라. 폐하의 전사를 왕비님께 전해라!"
대장은 단숨에 그 말만을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령이 준비된 말에 뛰어올라, 렌스터 성을 향했다. 순간 망연자실하던 병사들도, 주저앉은 기사를 위로하고, 그곳에 준비되어 있던 침대로 데려갔다. 다른 병사들도 무기를 준비하거나 주변에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두 곳의 요새로부터 렌스터 성에 연락이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폐하의 것이라 생각되는 말이 피를 뒤집어쓴 채, 요새로 되돌아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우리 군이, 트라키아 강에서 트라키아 왕국과 교전했습니다. 그 와중 코노트가 배신해, 아군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폐하께서 전사하셨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뭐라, 폐하께서.....! 즉시 왕비님께 알려드려야.. 성 내의 남아 있는 병사들을 모으도록. 트라키아가 곧 올 거다."
보고를 받은 장군은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지시를 내려갔다.
성에 남아 있던 장군들 중, 현역이라 할 수 있는 자는 젊은 드리아스 장군 뿐이었다. 보고를 받고 있었던 것도, 젊은 병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노장이었다.
"....뒤에서 손을 써, 코노트를 부추킨 걸 테지... 트라키아가 할 법한 일이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 병력으로, 어떻게 성을 지킬 것인지가 제일 중요한 과제인 겁니다, 여러분."
노장이 머리를 싸매는 가운데, 위세 좋게 울리는 드리아스의 호통에 조용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 성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리프를 지켜, 렌스터의 피가 끊어지는 것을 막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왕비님, 그 옷차림은..."
"리프가 도망칠 수 있도록, 이곳에서 항전할 겁니다.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리프를 놓치게 한다. 그리고, 재기를 도모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왕비는 전장복을 입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에슬린처럼 국왕과 함께 전쟁터에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 모인 노장군 중 몇몇은, 이 모습의 왕비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왕비의 남다른 결의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마음을 다잡았다.
"핀에게는 리프를 데리고 도망치도록 지시했어요. 저는 트라키아 병사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미끼가 되겠어요. 여러분도 그걸 도와주세요. 나와 같이 남는 자들은, 죽음을 각오해 주세요. 드리아스는, 핀과 함께 리프를 지켜주세요. 리프가 살아 있다면, 렌스터의 부흥도 가능하고, 성스러운 노바의 피가 끊어질 일도 없습니다. 드리아스의 부대에는 젊은 기사도 있으니, 리프를 지키는 핀에게도 든든하리라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리프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드리아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왕비의 말씀을 받았다. 다른 장군들도, 침통한 심정에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이 렌스터가 잠시만일지라도 멸망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왕비 님, 당신도 리프 님과 같이 도망쳐 주십시오."
"그건 무리에요. 트라반트라는 남자는, 저까지 놓아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리프뿐이라면, 어떻게든 속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제가 이 성에 있어야만...."
상냥하게 논하는 왕비의 눈동자에는, 이미 각오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희도 늙었다고는 하나 렌스터의 기사. 훌륭히 임무를 완수해내 보이겠습니다."
드리아스를 제외한 장군들은, 저마다 왕비와 함께 싸울 결심을 하며 나왔다.
"드리아스, 놈들을 교란시키기 위해서 흩어져 달아나게 해라. 한 방향으로 뭉쳐 도망가면 그만큼 눈에 띈다. 리프 님의 일은 핀에게 맡기고, 경로 확보를 최우선으로 하면 될 거다."
"네, 알겠습니다."
"라케시스 님께도 리프를 따라가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갓난아이를 데리고 있지만, 그 전란에서 빠져나오신 분.... 반드시 힘이 되어주실 거에요."
노장군들의 조언과 왕비의 따듯한 말에, 드리아스는 앞으로 닥쳐올, 괴롭고 힘든 나날들을 생각했다.
리프의 방에서도 왕비로부터 사정을 들은 핀이 가만히 서 있었다.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왕비도 마찬가지로, 곧 정신을 가다듬은 왕비가 주변에 지시를 내렸고, 방으로 돌라간 것이었다.
"폐하께서 돌아가셨다니.. 큐안 님....전..."
얼빠진 핀을 현실로 되돌린 것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리프 왕자였다.
"왜 그래, 우는 거야?"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프 님."
리프를 안아든 핀은, 주변의 시녀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할머님은, 왜 그런 거야?"
"네, 볼일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리프 왕자를 안은 손이 아직도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핀은 리프 왕자를 도망치게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녀들을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금방 싫증내던 왕자가, 신기하게도 얌전히 팔에 안겨 있었다.
"핀, 걱정돼서 왔어요. 리프 왕자는...."
문이 열리며, 라케시스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애용하는 갑옷을 입고 난나를 안고 있는 모습이, 용맹하고, 믿음직스럽게도 느껴진다. 그런 그녀에게, 준비를 분부 받고 갈팡질팡하던 궁녀가 당황하며 물었다.
"아, 라케시스 님. 어떻게 할까요... 뭘 챙기면 좋을까.."
"리프님의 옷을 몇 벌, 가능한 한 장식이 적을수록 좋아요. 어디에 숨든 티가 나지 않는 게 제일. 그리고, 에슬린 님이나 큐안 님이 가지고 계시던 것을 가져갑시다. 리프 님이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님을 기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게 좋을 거에요. 가능하다면, 렌스터 문양이 들어간 것이 좋아요."
우왕좌왕하던 시녀들이, 척척 부탁받은 것을 꺼내왔다.
"핀은 그대로 나갈 수 있나요?"
"아, 예, 언제든지. 가져갈 것 같은 건 없으니까요.... 마구간에 가면 제 말이 있을 테고, 무장도 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역시 기사네요. 저도 이젠 언제든 괜찮아요. 왕비님께선..."
"아마도 군의에... 젊으셨을 때는, 큐안 님이나 에슬린 님처럼, 국왕 폐하와 함께 전쟁에 나가셨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난나를 내려놓고, 라케시스도 의자에 앉았다. 준비를 마친 시녀가 라케시스와 핀에게 확인을 요청한다. 라케시스가 짐을 살펴보고, 부족한 것을 지시해 간다.
"왕비님은 어떻게 하실 작정인지 모르겠네요.."
라케시스의 표정이 흐려졌다. 노디온 성이 함락될 뻔했던 그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핀은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씩씩한 모습. 적은 수의 부하를 격려하며, 성을 지켜내려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때는 도움이 왔었다. 핀도 있었던 시글드 공자가 이끄는 군이,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췄었다.
렌스터에는 도와주러 올 자가 없다. 그란벨 제국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해도, 친분이 두터웠던 시알피는 반란세력으로 구축되었고, 렌스터도 그렇게 보여졌을 것이다.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건, 괴로운 일이군요..."
"벌써부터 약한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요, 핀. 리프 님도 웃으실 거에요."
"핀, 이상해."
천진난만하게 올려다보는 리프 왕자가 핀의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 준다.
"이상합니까.... 리프 님...... 같이 여행을 떠나도록 합시다."
"할머님도?"
"아뇨, 왕비님은 성을 보셔야 하기 때문에, 저와 라케시스 님과, 또 몇몇 사람과 갈 거에요. 지금 바로 당장이라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리프를 속이기 위해서, 핀은 리프에게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런 핀의 모습을 라케시스는 안쓰럽게 바라본다. 성에서 무사히 도망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라케시스는 몸소 알고 있었다. 어거스트리아에서의 사건 이후, 시글드 일행의 호의로 동행했던 시레지아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그란벨의 그 전투를 피해, 아들을 이자크에 맡기고 나서 이 렌스터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나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가... 그러나, 죽은 오라버니의 마음과 자신을 사랑해 준 자의 마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 그것만이 라케시스를 살아있게 해 준 것이었다.
"자, 리프 님 당장이라도 나가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핀이 일어섰을 때, 전령 역의 시녀가 뛰어 들어왔다.
"용기사입니다. 용기사가 상공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나 빨리.."
"여러분들은 빨리 탈출하시면, 드리아스 님 휘하의 기사가 지켜드릴 겁니다."
단숨에 그렇게 말한 시녀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말의 의미를 이해한 다른 시녀들 사이에 전율이 일었다.
"침착하세요. 우리들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길도 보일 거에요."
"라케시스 님... 저희들도 함께 하겠습니다. 저희들이 방패가 되겠습니다. 그 사이에 도망쳐 주세요."
"방해가 됩니다. 각자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세요. 그게 낫습니다. 만약 우리들 대신 적의 시선을 끌겠다면, 다른 렌스터 기사님께 부탁해서, 같이 도망치세요. 당신들은 렌스터의 자들입니다. 리프 님의 무사를 바라며, 함께 돌아갈 날을 위해, 살아남으세요."
"라케시스 님..."
"가세요. 우리 일은 걱정하지 말고... 이래봐도 지금까지의 전란에서 싸워왔습니다. 핀과 나란히 견줄만할 정도는 되니까요."
"무운을... 핀 님, 리프 님을 부탁드립니다."
"얼스터로 도망치겠습니다. 살아 있다면, 그 때..."
"리프 님, 무운을..."
"갈까요? 핀."
"네, 빨리.. 리프 님, 이 라케시스 님이 리프 님과 함께 가실 겁니다."
"갑시다, 리프 님.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난나와 같이..."
"빨리요!"
시녀들의 재촉을 받으며, 핀과 라케시스는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