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에르
! 문장사의 팔찌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어요.
엘
역할을 다한 팔찌는 바로 다시 모이는 일이 없도록
모습을 감춘다고 합니다.
일
어째서… 어째서…냐……
팔찌의 힘을 얻었는데도 이기지 못하다니…
-
솜브르의 뜻을 잇겠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일
아버님의 뜻을 잇지 못한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
아니, 태어난 그 순간부터 가치 같은 건 없었지…
그런데도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버렸다.
엘
당신은 무가치한 존재 같은 게 아닙니다.
저의 특별한, 둘도 없는 쌍둥이니까요.
일
헛소리 마라. 말했을 텐데…
나는 「일」이 아니라고.
일
진짜 「일」은 천 년도 전에,
엘에게 용석을 받은 직후에 전장에서 죽었다.
-
누이를 위해 공이라도 세우려 했던 모양이지만,
힘이 부족했지.
일
나도 사룡의 자식 중 하나다.
내 쌍둥이는 내가 철들기도 전에 죽었지.
-
나는 쌍둥이로 태어나는 자식들 사이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현하지 못한 채 늘 고독했다.
-
나하고 일은 둘 다 자식으로서 가져야 할 능력도 없었고,
외모도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었지.
-
의기투합하게 된 이후, 서로 싸우는 자식들 틈에서
일과 있을 때만큼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쌍둥이가 없는 내게는…
일이야말로 내 반신이었다.
일
하지만 일에게 반신은…
어디까지나 엘이었겠지.
-
전장에서 죽어 가던 일을 발견한 그때,
용석을 맡기며 누나를 부탁한다고 하더군.
-
여기서 죽으면 누나가 슬퍼할 거다.
우수한 누나의 쌍둥이가 없어지면 폐가 될 거다.
뤼에르
그 이후부터 당신은 일을 가장하게 된 거군요.
일
그날 죽은 게 나인 것으로 속이고서 말이지.
-
홀로 남은 자식의 죽음 따위… 기록에도
아버님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겠지만.
셀레스티아
설마 두 분께서…
진짜 쌍둥이가 아니셨다니.
일
다 알아들었으면 죽여라.
이제 망설일 이유도 없을 테지.
-
나는 세계를 유린하고 멸망의 구렁에 빠뜨린 악이다.
여기서 끝내지 않으면, 충동이 다시 눈뜰 테지.
-
아니면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나?
말해 보시지… 엘.
엘
일이 이미 죽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따져 물으려고 하지 않았죠.
-
일을 대신해 주는 당신은 틀림없이…
너무나도 다정한 사람일 테니까.
-
저는 당신도
제 진짜 쌍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전부 지어낸 소리겠지!
-
기억하나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신룡왕성의 묘지에 인사를 하며 꽃을 바쳤던 것을.
-
그때, 일이 가지고 있던 물건도 놓아 두었습니다.
당신도 모르는, 일이 좋아했던 꽃을 말린 것이죠.
-
저는 신룡 님과… 일에게 인사를 건네고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엘
일이 죽어서 슬펐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죠.
-
하지만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느새 당신을 아끼는 마음이 생겨나서…
-
누나라고 불리는 게 기뻤고,
당신의 미소가 쓸쓸함을 달래 줬어요.
-
당신에게는 거짓된 시간이었다고 해도,
저는 함께 지내서 행복했습니다.
-
이렇게 계속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당신이 있어 줬기 때문이고요.
-
당신을 가장 믿고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하지만 그 속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은…
-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쌍둥이가 아니라는 증거겠죠.
일
그래, 줄곧 듣고 싶었던…
더할 나위 없는 작별의 말이다.
엘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충동을…
막을 방법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
괜찮아요… 제가 죽으면
그 가슴의 고통도 사라질 겁니다.
-
저는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게 맞아요.
엘
조금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
자결 같은 짓을 했으니, 진짜 일과…
신룡 님의 곁으로는… 못 가겠군요.
-
그래도 저는… 당신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잠에 들겠습니다…
일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나는 잘라 내 버려도 되는 존재잖아.
엘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역시 저한테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
엘이 마지막에, 뭐라고 한 거지?
원망의 말도 제대로 된 유언도 없이.
-
진짜 일은 죽기 직전에…
「엘을 지켜 줘」라고 말했었는데.
-
내 소원은 그걸 이뤄주는 거였어.
엘의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지키고 싶었다고.
-
일의 몫까지… 엘을,
누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
그 마음을 언제…
어디에 두고 와 버린 거지?
-
가슴이 아파… 아직도 아파…
누나는 거짓말쟁이야.
-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아프잖아!!
뤼에르
부서진 용석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요.
셀레스티아
저건 솜브르의 마력이에요.
어쩌면 솜브르는 용석에 주술을 걸어서…
-
일 님… 아니, 라팔 님께
거짓된 증오심을 심어 놓았을지도 모르겠네요.
-
용석은 주인의 죽음에 의해서만 파괴되니까…
엘 님이 돌아가신 그 순간이 돼야 주술이 풀리게끔.
뤼에르
그렇다면, 그는 솜브르 때문에
엘과 서로 죽이게 될 운명이었다는 건가요?
-
주술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불쌍하니까 용서해 주겠다고 할 셈이냐?
-
아버님의 주술이 있든 없든
이 모든 것은 내가 짊어진 업이고 이 감정은 내 것이다!
-
저지른 일도, 빼앗은 것도,
모두 내가 결정하고 내가 바라던 것!
-
이 충동도 죄도,
설령 아버님이 오더라도 넘길 마음은 없다!!
라팔
나는 힘을 얻었다. 내 소원은 이루어졌지.
후회는 없어. 다만…
-
일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게 전부다.
라팔
강한 힘을 지닌 용족은 자신의 생명력을…
상대에게 건넬 수 있다고 들었다.
뤼에르
네, 저는 원래 세계에서 어머니…
신룡왕에게 힘을 받아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났으니까요.
라팔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 봐야겠군.
몇천 년이 걸리든, 엘을 다시 눈뜨게 하겠어.
-
모두가 사라진 이 세계에서, 영원한 시간 속에서,
쌍둥이가 눈뜰 것만을 믿고 기다려 보겠다.
-
아니, 지금도…
두 사람은 서로 쌍을 이루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뤼에르
엘이 눈을 뜨면, 제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을래요?
저희 세계의 엘레오스 대륙으로요.
뤼에르
이곳을 통한다면 제가 있는 엘레오스로 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요.
-
여기가 솔라넬이기 때문인지…
조금 전부터 제 세계의 기척이 느껴지거든요.
라팔
그건 이세계로 통하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7팔찌의 힘이 그렇게 만든 거겠지.
-
아버님의 소원을 이뤄 내고 싶다는 바람이
그렇게 한 걸지도 모르겠군.
-
네 녀석이 말한 것처럼… 그 길이 있는 한은
다른 세계로 가는 것도 가능하겠지.
뤼에르
그렇다면 당신에게 신룡의 가호를 줄게요.
때가 되면 이쪽으로 올 수 있도록이요.
-
저희 세계의 솔라넬은 신룡의 가호 없이는 못 들어오거든요.
저희 쪽으로 와 주면 그것만으로도 바로…
-
함께 싸운 여러분이 온 걸 알 수 있어요.
라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려 들던 상대를
동료로 받겠다고? 이해할 수가 없군.
-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라면 거절이다.
신룡의 밑에서 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
…하지만 그래.
천 년씩이나 지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
먼 훗날 엘이 눈을 뜨고 나를 용서한다면,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때는…